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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스님들이 수행했던, 지리산 벽송사

도인송, 미인송 소나무가 아름답던 곳,
등록날짜 [ 2013년07월28일 08시31분 ]

 

 

 

 

 

전라도 와 경상도를 덮고 있는 지리산은 어느 쪽에서 올라가도 절경이 아름답고

곳곳에 계곡이 있어 마르지 않은 지리산이다

지리산을 찾는 사람들 가슴에 촉촉한 감성을 심어주는 산이 아닌가 싶다

 

지리산을 일컬어 어머니 품속 같다고 표현을 한다

어머니 품처럼 넓게 펼쳐진 모습을 바라보면 지리산은 높은 산이라기보다

깊고 그윽한 어머니 품 같기 때문이다

곳곳에 아름다운 비경이 숨어있는 깊은 산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어제 소개한 서암정사를 나와 왼쪽으로 한참 산길을 따라 오르면 벽송사에 이른다

벽송사에 도착하니 절이 오래되었다는 느낌보다 최근의 만들어진 건물들이 즐비하였다

현재 있는 건물 중에 옛날 그대로 남아있는 것은

벽송사 입구에 있던 목장승 두 구와 삼층석탑 한기가 전부였다

사찰 입구의 문지기처럼 우뚝 서 있던 목장승은 온전한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 오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모습이었다

 

벽송사 석탑이 있는 곳에서 경내를 배경으로 바라다보이는 지리산 자락이

정말 아름답던 절이었다

 

 


 

 

지리산 중에 있는 벽송사는 매우 유명한 두 분의 도인을 배출한 절로 알려져 있다

임진왜란 당시 승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하면서 숱한 일화를 남긴

서산대사와 그의 제자 사명대사가 도를 깨우쳤다는 지리산 벽송사는

이곳에 남은 유물로 보아 천 년이 넘은 절로 추측을 할 뿐 기록이 없다고 한다 

벽송사는 한국 선불교 최고의 종가라고 일컫고 있지만

사찰의 창건연대에 관해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하다고 한다

신라말에 창건된 고찰이었지만 몇 차례 화재를 겪으면서 조선 중기에 중창되었다가

이 절이 한국전쟁 당시 야전병원으로 사용하면서 화재를 당하면서

절이 사라졌던 것을 1960년에 다시 중건하는 아픈 상처를 가진 절이다

이렇게 벽송사도 지리산의 여느 절과 마찬가지로 한국전쟁의 화마를 피해 갈 수 없었던 모양이다.

 

 


 

 

벽송사를 바라보니 지리산에 있는 사찰치고는 규모가 크게 느껴졌다

한국전쟁의 화마를 입지 않았다면 꽤 큰 절로 유명했지 않았을까 싶었다

단지 아쉬운 점이라면 새로 중창하면서 온통 콘크리트로 뒤덮인 풍경들이 아쉬울 뿐이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지리산의 냄새를 그대로 간직한 절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흙냄새 가득한 절이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벽송사 입구에 도달하여 바라보니 내 눈에 먼저 들어오는 소나무 두 그루였다

도인송과 미인송이란 이름에 걸맞게 예쁜 소나무들이다

벽송사라는 이름 그대로 푸른 소나무가 있는 절이란다

사찰 뒤 언덕배기에 자리한 오래된 고목으로 자리하는 소나무 두 그루를 바라보면서

벽송사란 이름과 걸맞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스팔트가 깔려있고 콘크리트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서 주변 건물을 담아보았다

어쩐지 고찰에 온 느낌이 들지 않는다

부처님을 모신 전각들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선방과 선원의 건물이 즐비하였다.

 

 

 


 


 

 

전래되는 설화로는 승려 서룡(瑞龍)의 이야기가 있다.

만년에 이 절에 머물렀던 서룡은 1890년(고종 27) 12월 27일에 문도를 불러서 입적할 것을 고하였으나,

제자들은 그믐의 바쁜 일이 끝나거든 입적할 것을 청하였다.

정월 초이튿날 다시 입적하려고 하자 제자들은 불공하러 오는 신도들이 많다는 이유로 다시 며칠을 미루도록 하였다.

 4일에는 “이제 가도 되겠느냐?”고 물은 뒤 제자들을 불러 “불법을 닦을 때 생사를 해탈하려면,

 먼저 생사가 없는 이치를 알아야 하고(知無生死), 둘째 생사가 없는 이치를 증득하여야 하며(證無生死),

셋째 생사가 없는 것을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用無生死).”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입적하였다고 전한다

 

 

 


 

 

울창한 나무에 둘러싸인 원통전과 산신각이 그나마 오래되어 보이고

작고 아담한 모습에 정감이 갔다.

 

 


 

 


 

 

원통전으로 오르는 계단에 새겨진 문양이 독특해서 담아보고..

그 계단을 밟고 올라가 원통전과 산신각을 들여다보았다

작고 아담한 어느 절집과 다르지 않은 분위기지만

나름 장소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가 보다.

 

 

 


 

원통전 앞에서 바라본 도인송...

 

 






 

 


 

 





 

 

절 경내를 돌아보고 도인송과 미인송이 있는 곳으로 올라가 보기로 하였다

한낮이라 그런지 그늘은 시원했지만

따가운 햇볕이 무척 강하게 내리쬐어 땀을 흘리며 거닐었던 기억이다.

 

 

 


 

 

3층 석탑이 있는 곳으로 오르면서 내려다본 벽송사와

저 멀리 보이는 지리산 자락이 참 아름다웠다.

 

 


 

 

3층 석탑이 덩그러니 보인다

넓은 터에 석탑만 있는 것을 보니...

이곳이 오래전 절터였던 것은 아닐까? 혼자 중얼거리며 다가가 보았다.

 

 

 


 

 

벽송사 삼층석탑(보물 제474호)

 

이 탑의 위치는 원래 벽송사 대웅전 동편에 세워놓은 것인데

사찰이 아래로 옮겨져 탑만 남게 됐다

2중 기단 위에 방형의 3층 탑신부를 이룬 통일신라 시대 양식을 그대로 계승한 탑이지만

사찰이 세워진 때가 조선 시대(1520년)이므로 그때 탑도 세워진 것으로 판단된다

탑의 위치가 법당 앞이 아닌 뒤편이라는 점이 특이하며

신라 시대의 삼층 석탑의 모습이 조선 시대까지 이어진 예로서 주목되는 탑이다

현재 탑의 상륜부에는 복발과 노반이 남아 있으며, 탑의 높이는 3.5m이다.

-안내문-

 

 

 




 

 


석탑이 있는 터와 그 둘레에 있던 오래된 소나무 숲이 정말 예쁘다

아름드리 고목이 오랜 세월을 말해주는 듯했다.

 

 

 


 

 

미인송과 도인송이다

미인송은 고개를 숙이듯 기울어 있고

도인송은 정말 꿋꿋한 절개를 말해주듯 위풍당당해 보였다

300년이 넘은 소나무로 보호수로 보호되고 있었다.

 

 

 

 


벽송사 목장승 2기(경상남도 민속자료 제2호)

 

사찰에 잡귀의 출입을 막고 사원 경내의 각종 규제와 풍수비보를 지켜주는 수문과 호법의 신장상구실을 한다.

 1910년대쯤에 세워졌다고 한다.

재질은 밤나무인데, 왼쪽의 장승은 머리부분이 불에 타 없어졌고 왕방울눈도 하나만 남아 있으며 코도 거의 알아볼 수 없다.

그러나 입은 홀쭉하게 꼭 다물어 뺨이 움푹 패인 모습과 그 아래 짧은 수염의 형태가 남아 있다.

몸통도 부패하여 반쯤밖에 남아 있지 않으며, 높이 180㎝에 둘레 125㎝로 금호장군 이라고 새긴 명문이 음각되어 있다.

오른쪽 장승은 둥근 짱구모양의 민대머리에 공을 박아놓은 듯한 왕눈, 그리고 주먹코의 모습이다.

입모양은 역시 합죽하며 입 주위에 불꽃무늬 같은 수염이 표현되어 있고, 턱밑에도 수염이 있다.

이와 귀는 새기지 않았고, 높이 200㎝에 둘레 130㎝로 몸통에 호법대신 이라고 새겨 있다.

이 장승은 그 기능에 따라 과장적이고 질박한 민속적 조각수법의 전형을 보이며,

 장승을 절의 수문신장으로 세워진 장승은

무서운 것 같으면서도 순박하고, 익살스러운 것 같으면서도 위풍당당한 모습이라서

보는 이들의 눈을 즐겁게 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이 두 장승은 불교와 민간신앙이 어우러져 나타난 걸작 조형물이라 할 수 있단다.

 

 

 


 

 

벽송사를 지키고 있는 도인송과 미인송을 한 번 더 바라보고

오래오래 건강하게 잘 자라길 바라고...

지리산 중에 있는 벽송사를 뒤로하고 산에서 내려왔다.

 

 


 

 

벽송사를 내려오다가 의탄교를 건너는데

채석장에 새겨진 부처가 보였다

거대한 조각상이라 여겨져 사진에 담아보았다.

금계마을 채석장이라는데

거대한 부처상이 새겨지는 중이란다

아직도 포크레인이 한창 작업 중으로 보였다.

 

그곳 주민의 말에 따르면 채석장 주인이 그동안 별 사고 없이 사업할 수 있게 해준

부처님 공덕에 감사한 뜻으로 거대한 불상을 조각하는 중이란다

 

올려다보니 어마한 크기였다

여러 해 동안 돌을 캐내면서 소음. 진동, 먼지 때문에

주변에 피해를 준 것에 대한 고마움의 뜻이라면 어떠랴..

 

폐채석장으로 남아 흉물스러운 것보다는

지리산을 파괴한 자리에 명물로 자리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던 풍경이었다.

 

 

 


 

 

 

지리산 여행은 고맙고 행복한 여행이 아니었나 생각이 든다.

여행이 주는 느낌과 경험이 참 소중하다 느끼면서

돌아보았던 함양의 여러 곳이 아직도 눈앞에 아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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