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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짓고 아들이 완성한 절, '경주 감은사지'

등록날짜 [ 2014년02월03일 16시44분 ]

 

 

 

 

동해의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7번과 31번 국도를 달렸다.

어떤 말로 표현이 안 될 만큼 겨울여행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동해안 따라 위로 올라가는 길은

중간마다 볼거리가 많아서 들려보고 기웃거려보고 그렇게 가는 길에 문무대왕 수중릉을 만나게 되고

수중릉과 가까운 곳에 있는 감은사지를 돌아보기로 했다.

여러 번 다녀가고 본 곳이지만 오래전에 문무대왕 수중릉에 대해서 포스팅을 했기에

오늘은 감은사지를 소개한다.

 

 

 


 

문무대왕 수중릉

 

아래 주소를 클릭하면 볼 수 있다.

http://blog.daum.net/flyyc/14678549
31번 국도여행- 경주 대왕암에서 모포리 해변까지

 

수중릉이 있는 바다를 거닐어 보고 감은 사지로 향했다.

 

 

 


 

 

나란히 서 있는 두 탑은 멀리서 보는 것보다 더 우람하고 장엄하기까지 하다.

가까이서는 카메라에 탑 전체를 담기 힘들 정도로 크고, 기울어짐이 전혀 없이 안정된 모습으로

떡 버티고 선 채로 천 년이 넘게 절터를 지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신라를 통일하고 동해 바다의 용이 된 문무왕을 위하여 만들었다는 설화가 전해지는 사찰터가 감은사지다.

이곳은 동해 바다에서 신라의 수도인 서라벌로 들어가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다.

서라벌로 들어가는 길을 통해 왜구의 침입이 잦아지자 부처님의 힘을 빌려서라도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문무왕이 감은사를 짓기 시작하였고 아들인 신문왕 때 완성한 절이다.

 

 

 


 

 

감은사지에 도착하자 덩그러니 두 탑이 서 있고

찾아오는 여행객을 반기듯 우람한 모습으로 두 개의 커다란 3층 석탑이 자리하고 있었다.

감은사지 삼층 석탑은 통일시기 신라인의 기상을 나타내는 큰 탑으로

신라 삼층석탑의 원형이 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한다.

멀리서 바라봐도 잘 보이는 두 개의 삼층석탑은 금당 앞으로 동, 서에 하나씩 놓여 있었다.

 

 

 


 

 

겨울이라 휑한 풍경들이 눈에 들어온다.

감은사지 옆으로 작은 상점들이 있는 풍경과 덩그러니 놓여있는 석탑 풍경도 왠지 쓸쓸함만 느껴졌다.

안내문을 읽어보고 감은사 절터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경주 감은사지 (사적 제31호)

 

《삼국유사》에 따르면,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고자 감은사를 짓기 시작하였으나 끝내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에,

 신문왕이 부왕의 유지를 이어받아 나라를 지키는 사찰로서 682년(신문왕 2)에 완공하였다.

《삼국사기》에 있는 바와 같이, 이 절의 금당은 부왕이 죽은 뒤 그 화신인 용이 출입할 수 있도록 신문왕이 건립한 것 같다.

절터는 동해에 이르기 직전의 산기슭에 있는데, 거기에는 큰 3층석탑 2기가 동남으로 흐르는 대종천을 앞에 두고 서 있다.

금당터는 비교적 잘 보존되어, 지표에는 원형 주좌가 각출된 1개의 초석이 있고,

곳곳에 사각형 초석과 대석이 있으며, 금당 마루를 이루었던 장대석 등이 있다.

중문터와 회랑터의 남쪽 절반 및 금당터의 대부분이 밭이 되었고, 회랑터 북쪽 절반과 강당터는 민가에 들어가 있다.

 

 

 


 

 

 

감은사지 3층 석탑(국보112호)

 

감은사지3층석탑은 감은사지에 동서로 나란히 서 있는 쌍탑으로

 감은사는 동해안(경주시 양북면 용당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사찰로, 문무왕 때 짓기 시작해 신문왕 때 완공하였다.

 지금은 3층석탑 2기와 금당 및 강당 등 건물터만 남아 있다.
감은사지3층석탑은 2단의 기단위에 3층 탑신을 올린 모습으로, 탑의 전체높이는 13.4m이다.

이 탑의 가장 큰 특징은 각 부분들이 하나의 돌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수십 개에 이르는 부분석재로 조립되었다는 것이다.

 탑을 세운 시기는 신문왕 2년(682)으로, 경주에 있는 3층석탑으로는 가장 거대하며,

 동해를 바라보는 높은 대지에 굳건히 발을 붙이고 하늘을 향해 높이 솟아오른 모습은 한국석탑을 대표할 만하다.

감은사는 682년(신라 신문왕 2)에 창건되었으므로 이 탑의 건립도 그 무렵으로 추정되어 가장 오래되고 거대한 석탑이다.

1960년에 서쪽 탑을 해체, 수리할 때 3층 탑신에서 창건 당시에 넣어둔 사리장치가 발견되었다. 
 해체 수리 시 3층에서 발견된 사리공에는 금동사리각외함과 그 안에 들어 있던 사리기, 사리병 등이 출토되었으며,

이것들을 감은사지서삼층석탑사리장엄구에 포함해 보물 제336호로 지정하였다.

 

지난 1996년 동탑의 해체 수리 시에도 이와 비슷한 사리장치가 발견되어 주목을 끌었으며

 2002년 보물 제1359호로 지정된 바 있다. 그러나 감은사지 석탑 공사는 부실복원공사로 논란을 빚어왔으며,

 결국 2006년 감은사지 서탑이 부분 해체돼 보수작업에 들어갔다가 2008년 보수가 끝나고 일반에 공개되었다고 한다.

 

 

 

 


 

 


 

 


 

 

탑을 사진에 담으려는데, 한쪽에 두 여행객이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탑이 얼마나 큰지를 비교할 수 있는 풍경이었다.

참으로 어마한 크기의 탑이란 것을 알 수 있다.

 

 

 


 

 

경주는 다 알고 있다시피 수많은 폐사지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그런 곳에는 탑과 부재만이 남아 있기에 그 이름과 역사를 알 수 없는 곳이 많다고 한다.

감은사도 마찬가지로 79년 발굴 당시 감은사라는 글씨가 새겨진 기왓조각이 나와 감은사터로 밝혀졌다고 한다.

또한 대부분 이름이 알려진 폐사지는 출토유물을 통해 그 이름을 확정하고 있는데

특히 기왓장에서 많이 발견된다고 한다.

 

 


 

 


 

 


 

 


 

 

감은사지를 돌아보면 모든 이의 관심을 갖는 두 탑과 또 이야기로 남아있는 금당자리의 석축이다.

금당 아래 석축 사이로 제법 큰 공간이 비어 있음을 볼 수 있는데

동해의 바닷물이 드나드는 길로 동해의 용이 된 문무왕이 오가던 길이라고 한다,

문무왕이 죽어서 묻혔다는 수중릉이 가까이 있어 정말 그 이야기가 맞는 것일까? 궁금증을 더하는 이야기다.

 

또 하나 곳곳에 놓인 석재에는 보통 절에서 사용하지 않은 문양인 태극무늬가 새겨진 석재를 볼 수 있다.

이곳 감은사지 태극 장대석은 고도의 천문학 상징체계라는 논문이 발표될 정도로 연구가 진행되고 있으며

이 무늬는 우리나라 최초의 태극무늬로 역사적으로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본단다.

 

 

 


 

 

언제부터 이곳에 자라고 있던 나무일까?

이곳을 지켜주는 나무들을 바라보며 고마운 마음이 생겨나고...

 

 


 

 

아무리 봐도 특이했다.

기다란 돌들이 걸쳐진 밑으로 길이 있고, 마치 돌다리를 놓은 것 같은...

바로 금당 터인데 동쪽에 구멍이 있고, 이곳으로 바다의 용이 된 문무왕이 들어와 쉬어 갔다는 것이다.

남북보다 동서로 더 긴 회랑이 있었고,

금당의 바닥구조는 H자형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했다고 한다.

 

 

 


 

 

절터 주변에 한겨울에도 푸른 모습으로 자라고 있는 대나무 숲을 바라보면서

신라의 역사를 가만히 생각해 보는 시간이기도 했다.

 

아버지와 아들은 왜구의 침입을 막고 국가의 안정을 위해 사찰을 짓기 시작했고

그 결실은 만파식적으로 나타났다고 본다.

이 감은사지는 비록 현재는 쌍탑과 금당터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신라인들의 숨결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을 돌아보면서 느끼게 되는 곳이다.

 

 

만파식적: (나라의 모든 근심과 걱정이 해결된다는 신라 전설상의 피리)

 

신라의 한 설화에 의하면

문무왕이 그 아들 신문왕에게 만파식적이라는 피리를 주어

문무왕이 죽은 후 바다의 용이 되었다가

만파식적을 불면 용이 나타나 국가의 안위를 지키도록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신라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을 위하여 감은사를 짓고 추모하는데,
죽어서 바다 용이 된 문무왕과 하늘의 신이 된 김유신이
합심하여 동해의 한 섬에 대나무를 보냈다,
이 대나무를 베어서 피리를 만들어 부니 적의 군사는 물러가고
병은 낫고, 물결은 평온해졌다고 한다.
이 설화에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흩어져 있던
백제와 고구려 유민의 민심을 통합해 나라의 안정을 꾀하려 했던
호국 사상과 모든 정치적 불안이 진정되고 평화가 오기를 소망하는 신라인들의 염원이 담긴 이야기다.

 

 

 


 

 

탑이 하도 커서 부분을 나눠서 담아보았다.

감은사지 3층 석탑은 통일신라 시대 최초의 삼층석탑이다는 점에서 더욱 보물의 가치가 있다고 하겠다.

점점 시대가 발전하면서 석탑에 통돌을 사용했지만, 이 감은사지 석탑은 수십 개에 이르는

부분석재로 조립하듯 만들었다는 것이 이채롭다.

 

 


 

 


 

 

이렇게 낙서를 하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도대체 왜? 여기 문화재에 이렇게 하고 싶을까?

여행하면서 꼭 만나게 되는 이런 것들....

제발 눈으로 보고 가슴으로 느끼는 것 말고 손대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담아왔다.

 

 

 


 

 



 


 

감은사지 밑으로 펼쳐진 들판이 오래전엔 바다였다는 사실과

이곳 감은사지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어야 했던 것은

바다의 용이 된 문무왕이 절까지 오려면 꼭 필요했을 테니까...

절터 앞쪽에는 지금도 배를 댈 수 있는 나루터 같은 곳이 남아 있는 흔적을 볼 수 있었다.

 

 


 

 

이곳 감은사는 문무왕이 새 나라의 위엄을 세우고

당시 틈만 나면 동해로 쳐들어오던 왜구를 부처의 힘으로 막아내어서라도 나라의 안정을 찾고자 했던

이야기는 얼마나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컸는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라 하겠다.

아버지가 짓기 시작하여 그의 아들이 완성했던 절 감은사는

말 그대로 아버지의 호국 충정에 감사하다는 뜻으로 감은사라고 이름 지었다고 하잖은가...

 

호국 충정, 가슴을 따뜻하게 하는 ....

나는 감은사지를 돌아보며 다시 한 번 나라 사랑의 감동을 했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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