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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광주박물관 '공재 윤두서 300주년 기념전'

등록날짜 [ 2014년11월12일 09시52분 ]

 

 

공재 윤두서 서거 300주년 기념전이 광주국립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다.

 

2014년 10월 21일부터 2015년 1월 18일까지 90일간 열리는 이번 기념전은 조선후기 화풍의 사실주의적 태도와 화가들의 회화관에 큰 영향력을 끼친 공재 윤두서(恭齋 尹斗緖1688~1715)와 그의 장남 낙서 윤덕희(駱西 尹德熙1685~1766)그리고 손자 청고 윤용(靑皐 尹熔1708~1740)으로 이어지는 3대에 걸친 서화세계를 조망하고 있다.

 

공재는 이 땅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실경산수보다 그 속에 살던 사람들의 생활을 회화의 대상으로 삼은 조선후기 픙속화의 태동을 예고한 대표적인 작가이다.

 

 

파란하늘에 노란 은행나무잎이 아름다운 가을날의 국립광주박물관.

 

 

 

공재 이전에는 수많은 화가들이 양반층의 산수화나 인물초상화에 주력했지만, 공재를 필두로 이후의 조선시대 화풍은 민중생활과 현실세태를 담은 풍속화가 시대를 풍미했으며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까지 김홍도, 김득신, 신윤복 등 화원화가에 의해 풍속화의 르네상스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럼 공재는 왜 양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실경산수화대신 이런 풍속화에 빠져들었을까? 국보 제240호로 지정된 윤두서의 자화상을 보면서 공재의 철학을 되새김해 보기로 한다.

 

공재는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1587~1671)의 증손자로 해남윤씨 어초은파(海南尹氏 漁樵隱派)7대 종손이다.

 

 

어초은파의 4대에 걸친 관직을 살펴보니 윤효정의 큰 아들 윤구가 성균관 사성을 역임했고, 막내아들 윤복은 충청도 관찰사를 지냈으며, 윤구의 큰 아들 윤홍중은 영광군수, 둘째아들 윤의중은 좌참찬 등의 벼슬을 지냈다. 윤흥중의 둘째아들 윤유기는 강원도 관찰사를 지내는 등 어초은파 4대 종손인 고산 윤선도에 이르기까지 해남 윤씨는 이미 명문가의 길을 걸어왔던 것이다.

 

 

 

고산 윤선도는 효종의 사부를 비롯해 많은 벼슬을 거쳤고, 유배와 은거생활동안 창작한 시가문학은 송강 정철의 가사문학과 더불어 오늘날 국문학사에서 가장 빛나는 위치에 있으며, 철따라 바뀌는 자연의 모습을 아름다운 우리말로 노래한 어부사시사와 오우가등 자연을 벗 삼아 살아가는 선비의 생활과 서정을 절제된 언어로 표현한 선비시조의 최고봉이자 산수 미학의 절정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럼 윤선도의 증손자이자 어초은파 7대 종손인 공재 윤두서(1668~1715)는 어떠했는가? 공재 윤두서는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과 함께 조선후기 삼재(三齋)로 꼽는 선비화가다.

 

 

(녹우당의 17~18세기 인장들)

 

1688년 해남 연동에서 윤선도의 넷째 아들 윤예미의 자손인 윤이후의 넷째(윤선도의 증손자)로 태어났으나 윤선도의 장남 윤인미의 종손 윤이석이 아들이 없자 윤선도가 자신의 후손 중 가장 점괘가 좋은 윤두서를 종손으로 입양했다.

자신을 낳아준 부모가 따로 있고 입양한 부모가 따로 있어 해남 윤씨 어초은파를 이어가야할 막중한 책임을 지게 되었지만, 전해지는 두 가지 일화에서 그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벼루와 그림을 그리던 책상)

 

어느 해 심한 가뭄으로 이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게 되었다. 이때 공재는 종가 소유의 백포 뒷산(망부산)에 있는 나무를 베어 소금을 구워 생계를 유지하도록 배려했다.

 

 

(적표마. 그림 윤두서, 글 윤순)

 

또한 종손으로 입양된 윤이석의 부인은 청송 심씨로 공재가 30세 되던 해 한양에서 양부 윤이석을 보러 해남으로 내려가는데, 이때 어머니 심씨 부인은 향장(鄕庄)의 묵은 빚을 받아오라 했다. 공재가 채권(債券)에 수록된 내용을 보니 그 액수가 수천 냥이 되었으며 빚을 진 사람들도 모두 가난하여 빚을 갚을 수 없자 공재는 채권문서를 모두 불태워 버렸다고 한다.

 

이렇듯 공재는 입양된 종손이지만, 자신의 뜻대로 구휼사업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던 인물인 것이다.

 

 

(앉아서 구름을 보다. 그림 윤두서)

 

공재는 15세에 전주 이씨(全州 李氏)와 결혼하였고 1693년(숙종 19)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생부 윤이후의 낙향과 갑술환국으로 남인계열의 실각이 이어지고 설상가상으로 윤두서의 셋째형 윤종서가 동궁을 두둔하고 신하를 비판한 상소를 올렸다가 거제도로 유배되고 다시 한양으로 소환되어 심문 중 죽은 사건이 발생하였고 장인과 큰형 윤창서까지 역모에 가담했다는 혐의를 받았지만, 우여곡절 끝에 무고로 밝혀진 뒤 해남 윤씨 가문에 크나큰 위기를 느낀 윤두서는 잘못하다가는 집안이 몰락할 수 도 있다고 판단하여 벼슬을 포기하고 학문과 시서화로 생애를 보냈으며, 46세에 해남 녹우당으로 귀향하여 백포리 윤두서 고택에서 은거하다 2년 후 연동에서 사망했다.

 

죽은 뒤 1774년(영조 50)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아들 윤덕희의 딸인 윤소온이 정재원과 결혼하여 정약용을 낳았으니 정약용의 외증조 할아버지가 바로 윤두서가 된다.

 

(배를 타고 있는 인물. 그림 윤두서)

 

공재는 10형제를 뒀다고 하는데 해남 윤씨 어초은파 종손 중에 가장 많은 자식을 낳은 것으로 알려졌다.

 

46세에 해남으로 돌아와 48세에 사망했지만, 그의 짧은 생애에 비해 공재는 정렬적인 다산가(多産家)를 이룬 것이다.

 

(금으로 그린 산수. 그림 윤두서)

 

이렇듯 자녀가 많게 된 일화가 있는데 해남 달마산 미황사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월야강루도 와 여자협객. 그림 윤두서)

 

그 후 장남인 덕희와 손자 용까지 공재의 예술가적 기질을 이어받아 화가가 되었다고 하니 해남윤씨 어초은파의 가풍은 분명 고관대작보다 예술가적 피를 이어받았음이 분명하고 화를 피해 해남으로 내려와 가문을 부흥시킨 것이 오늘날의 명문가 해남 윤씨 어초은파를 있게 한 계기가 되었음은 윤두서의 미래를 바라보는 혜안이 높았다는 것을 증명한다.

 

 

(수하정관도. 그림 윤두서)

 

 

(고씨 화보)

 

공재는 그 누구에게도 그림을 배우지 않고 중국에서 전해져 온 고씨 화보와 당시화보 등을 놓고 그림을 익혔다고 한다.

 

남북조시대부터 명대에 이르기까지 백여 명의 대가들의 그림이 실린 고씨 화보는 그림의 특징까지 세세하게 쓰여 있어 윤두서가 그림공부를 하기에 최적이었다고 한다.

 

그는 고씨 화보의 그림을 따라 그리면서 연습을 했지만, 대상을 직접 관찰하고 사생하는 노력으로 자신만의 그림을 만들어 냈다.

 

 

(말을 씻다. 그림 윤두서)

 

이러한 노력이 민중의 생활상을 그리는 것에 나타나 조선 후기 풍속화의 선구자가 되었으며 그의 시문학과 실학정신은 외증손자인 다산 정약용에게까지 이어졌다.

 

(말을 타고 있는 인물. 그림 윤두서)

 

윤두서는 인물화 외에도 특히 말 그림을 잘 그릴 정도로 말을 아끼고 사랑했던 선비로 말 그림의 대가이다. 

 

 

(말. 그림 윤두서)

 

공재는 말년에 해남에서 말을 기르며 여러 점의 말 그림을 남겼다. 그의 말 그림은 오랜 시간 사물을 관찰한 후에 얻어진 세밀한 묘사와 선비로서의 고매한 정신세계가 어우러진 최고의 명작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술에 취해 말을 달리다. 그림 윤두서) 

 

공재는 실제 말을 보면서 스케치에 해당하는 사생을 수없이 반복했으며, 말의 신체적 특징을 완벽하게 구현한 그의 묘사력은 중국에까지 유명세를 떨칠 정도였다. 특히 말을 아껴서 타지 않았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로 말에 대한 사랑도 지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덟 마리의 준마. 필자미상)

 

공재의 말 그림이 얼마나 유명했으면 조선 후기 너도 나도 말 그림을 그리며 공재의 낙관을 찍는 바람에 수없이 많은 말 그림이 존재했다. 그러다보니 필자미상의 말 그림까지 공재의 진품으로 둔갑해 많이 소장했다고 하며, 정조 대에 이르러 이 분야의 대가였던 김홍도와 신윤복에 의해 더욱 발전되었다.

 

 

국보 제240호로 지정된 윤두서의 자화상.

 

전시되어 있는 그림은 진본으로 바로 앞에서 사진촬영이 금지되었다. 가로 20.5cm 세로 38.5cm로 실제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그렸다.

 

 

 

 

해남 윤씨 녹우당에 전해져 오는 백동경

 

 

(조선사료집진속. 1937년 촬영)

 

 

 

공재의 자화상을 최초로 찍은 사진은 1937년이다.

 

당시 사진에는 얼굴만 있는 것이 아니라 도포의 옷주름까지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얼굴만 그린 초상화가 아닌 상반신 전체를 그렸지만, 현재 전해지는 그림에서는 도포가 사라지고 없다.

 

하지만, 2006년 적외선 촬영에 의해 밝혀진 것에 의하면 얼굴은 사진을 찍듯이 완벽하게 재현한 반면 몸체는 유탄으로 희미하게 그리고 탕건도 일부분만 그린 것으로 정본을 염두에 두고 그린 초본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공재 자화상에 대한 과학적 조사.

 

 

 

공재의 자화상을 보면, 당시에 글 쓰는 선비가 자신의 자화상을 그렸다는 것도 신기한 일이지만, 정면상을 그렸다는 것은 더 놀라울 정도로 획기적인 일이었다고 한다.

 

 

화면가득 얼굴만 그리고 머리 윗부분은 과감히 생략해버린 도발은 실로 놀라울 따름이다. 당시 어느 화가가 자신의 자화상을 그리면서 머리 윗부분을 날려버릴까? 현대에 이르러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싶다. 또한, 금세 눈동자가 튀어나올 것 같은 강렬한 모습과 늘어뜨린 구렛나루 수염까지도 바람결에 흔들리게 보일 정도니 그 섬세함에 그저 말 문이 막힐 뿐이다.

 

이것은 누구보다도 박학하고 세상을 꿰뚫어 보는 시선을 가진 자신이 당쟁의 혼란스러움에서 관직에 오르지 못한 고독을 이 자화상은 보여주고 있다. 즉, 세상의 불행함속에서도 꿋꿋하게 선비의 길을 가고자 했던 선구자의 마음을 담아낸 것이다. 그는 당시 최초로 백성들의 삶을 화폭에 담았으며, 풍속화의 시초가 된 공재의 화풍은 아들 낙서 윤덕희와 손자 청고 윤용에게로 이어졌는데, 정밀하고 빼어난 묘사력과 사실주의적 청작태도는 대상을 앞에 두고 그림을 그릴 때 '인물이나 동식물을 그릴 때면 꼭 종일토록 대상을 주목해서 그 진형을 터득한 후에야 붓을 들었으며, 동자를 그릴 때면 머슴아이를 모델로 세웠다'는 기록에서 보듯이 학문에 있어서도 '반드시 연구 조사하고 그 뜻을 정확히 파악하여 실사(實事)에 비추어 밝혀내고 배운 바를 항시 실득(實得)하였다'는 실사구시 자세와도 일맥상통한다.

 

 

 

(공재선생 측면상. 그림 강요배)

 

화가 강요배 씨가 강렬한 앞면을 보고 측면을 상상해서 그린 그림이다.

 

 

 

 

공재 윤두서 서거 300주년 기념전이 열리고 있는 광주국립박물관 2층 기획전시실. 따스한 가을햇살아래 파란 하늘은 빨갛고 노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지만, 하루 종일 많은 사람들이 해설사를 따라 공재의 그림 속에 담긴 철학을 공부하고 있었으며 한 무리의 중국 관광객들도 공재의 기념전을 관람하기위해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광주광역시>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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