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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유적지] 항파두리 항몽유적지

삼별초 최후의 격전지 '항파두리 항몽유적지'
등록날짜 [ 2015년11월11일 12시59분 ]
 
 
 
 
 
고려시대 삼별초 최후의 격전지
항파두리 항몽유적지
 
 
 

'삼별초'는 고려시대 경찰 및 전투의 임무를 수행한 부대의 이름으로, 도둑을 잡는 야별초에서 발생하여 후에 좌별초, 우별초로 나뉘고 나중에 신의군이 합류하면서 삼별초라 불리어집니다. 삼별초는 날쌔고 용감한 군대로 알려져 전투와 경찰 그리고 형옥(刑獄)의 임무를 맡았고 경찰의 기능에 있어서는 당초 삼별초의 출발이 야별초에 있었으며 야별초의 출발이 도둑을 잡는 데 있었기 때문에 삼별초가 도둑을 잡고 난폭(亂暴)을 금지하는 것은 원래의 사명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삼별초는 전국에 걸쳐 경찰권을 행사하였고 형옥의 기능에 있어서는 죄인을 잡아 가두거나 죄를 심문하기도 했는데, 도둑뿐만 아니라 반역 죄인까지도 관할하였습니다. 

 

군사 활동에 있어서는 수도경비대·친위대·특공대·경찰대·전위대(前衛隊)·편의대(便衣隊) 등의 임무를 맡았습니다. 특히 40여 년 동안 대몽항쟁 핵심부대로, 대몽항전기에 큰 활약을 하였으나 원에 굴복하여 강화를 맺은 정부에 반기를 들어 1270년(원종 11) 진도를 거점으로 새 정부를 세웠고 여몽연합군에 패전한 뒤 제주에 들어와 끝까지 항쟁하다 최후의 보루인 항파두리성이 함락되면서 삼별초의 대몽항전은 종결을 짓게 됩니다.

 


 



 


 

제주도 기념물 제28호. 현재 15리에 이르는 토성(土城)과 삼별초(三別抄) 군사들이 궁술훈련 때 과녁으로 사용했던 ‘살 맞은 돌’, 성의 건물 문지였던 ‘돌쩌귀’, 김통정(金通精) 장군이 성 위에서 뛰어내린 발자국이 파여서 샘이 솟는다는 ‘장수물’, 삼별초 군대가 급수로 이용한 ‘옹성물’·‘구시물’, 옥터 등이 남아 있습니다. 이 유적지는 1977년 호국정신을 함양하고 총화단결을 다짐하는 뜻에서 교육장으로 활용하고자 석성(石城)인 내성(內城)이 위치했던 9천여 평의 경내에 ‘항몽순의비(抗蒙殉義碑)’를 세우는 등 성역화되었다고 합니다.

 


 

 



 

 


 

가을의 길목, 곱다란 억새가 항몽유적지로 가는 길을 반갑게 맞아줍니다. 보랏빛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바람 따라 가녀린 몸을 이리저리 흔드는 모습은 가을로 옷 입은 제주의 고운 풍경입니다. 어느새 제주에도 가을이 성큼 다가오고 있었나 봅니다. ▲

 

 








 


항몽유적지로 향하는 길에 보이는 항파두리성의 흔적들이 보이고 흙과 돌을 섞어 여러 층을 쌓았던 이 성은 거의 붕괴하였으나, 그중 일부는 복원되었다고 합니다. 언덕과 하천을 따라 최대한 자연지형을 그대로 이용한 토성으로 이루어진 외성입니다. 문득 보면 언덕으로 보이겠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토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은 아름다운 코스모스군락을 이뤄 멋진 풍경을 자아내고 있고 물론 자생 군락은 아니지만, 곳곳에 펼쳐진 멋진 꽃밭은 가을 제주의 멋진 경관지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

 


 




 


고내 포구에서 광령1리사무소로 이어지는 올레 16코스에 속한 항몽유적지는 잠시 멈추어 서서 제주의 역사를 둘러보는 코스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올레객들 보다는 일반 관광객들의 발길이 더 잦은 곳이기도 합니다. 짧지 않은 올레코스가 걷기에만 치중해 본래 의도와는 달리 변질해 완주만을 위한 올레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타성에 젖은 올레길도 다시 코스별 특성을 재조명하여 단순히 걷는 길이 아닌 참다운 제주의 모습을 보여주도록 재정비를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









 

올해 7월부터 항몽유적지는 무료입장을 시행하고 있고 또한 토성을 복원하고 유적을 발굴하는 공사를 하고 있어 다소 어수선합니다. 정비사업이 끝나면 항몽유적지는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하게 될 듯합니다. ▲



 

 






 

전시관에는 항파두성 토성의 축조기법에 대한 설명과 삼별초의 제주입성과 최후의 모습 그리고 몽골인들을 토벌하는 과정을 그림으로 설명을 하였고 유적을 발굴하면서 나온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항몽유적지에 대해 간단하면서도 쉽게 설명하고 있어 그냥 지나치지 말고 둘러보는 것이 좋습니다. ▲


 





매표소 맞은 편에는 돌쩌귀라는 유적이 보존되어 있는데, 삼별초의 김통정 장군이 항파두성을 쌓고 동서남북에 사대문을 내면서 그 돌쩌귀로 사용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당시 성문의 규모가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아 그때의 돌쩌귀인지는 확실치 않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건축물에 이용되었던 것만은 확실하므로 주변을 정화하면서 흩어져 있던 10개의 돌들을 모아 이곳에 보존하고 있다 합니다. ▲




항파두리성 물 유적



문헌에 따르면 "항파두 고성 안에는 솟아나는 샘물이 있는데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 물이 '옹성물'과 '구시물'입니다. 지금도 물이 솟아 나오고 있으며 보호 관리되고 있습니다. 성 밖으로는 '장수물'과 '유수암천'이 있습니다. 용천수들은 지형이 낮은 곳에 있어 성을 쌓는 데 불리한 조건이므로 본성을 축조하고 난 다음 물을 이용하고 보호하기 위해 보조성을 둘렀다고 합니다. 지금은 일부 보조성이 도로 개설로 잘려나간 상태이지만, 토성의 흔적은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항파두리 토성 북동쪽 앞 옹성물 동쪽에 있는 샘물입니다. 구시물이 들어선 동산을 '구시물 동산'이라고 일컫습니다. 구시물은 삼별초 군이 항파두리성을 축조할 때부터 식수 등의 생활용수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물을 보호하기 위해 반원형의 보조성도 쌓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구시물은 처음에는 군사적으로 사용되었다가 민간 생활용수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이 물은 어떤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솟아 흘렀다고 합니다. ▲







 

 


옹성물은 항파두리 토성 북쪽 극락사 절 뒤편에 있는 오성물을 말하고 있으나, 항파두리 토성의 보조성인 옹성 안에 있다고 하여 '옹성물'이라고 전해집니다. 당시에는 물이 세차게 솟아올랐다고 하나 지금은 물량이 아주 적어졌다고 합니다. 물이 솟아나는 곳은 사각형으로 보호 칸을 만들었고, 삼별초군 주둔 당시에는 김통정 장군과 귀족들만이 이 물을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이 물을 이용하기 위해 '내성'과 연결된 도로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삼별초 군이 패배한 후에도 마을 사람들은 집안에 정성을 들여야 할 일이 생기면 반드시 이 물을 사용하였다고 전해집니다. ▲

 

 

 






 

'장수물'은 항파두리성 북서쪽 건천 '골그미내'가에 있는 샘물입니다. '횃부리' 또는 '횃부리물'이라는 이름이 '장수물' 보다 더 고유한 이름입니다. '장수물'은 '장수발자국'이라고도 하고 김통정 장군이 관군에 쫓기다가 성을 뛰어넘었는데 이때 파인 발자국에서 물이 솟아났다는데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장수물'이라는 이름은 나중에 전설에 의한 것으로 보이며 지금도 물의 양은 적지만 계속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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