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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강진군 사찰탐방 제2편

전라남도 강진 여행기
등록날짜 [ 2016년01월06일 11시37분 ]

 

 

 

여행일자 : 2015년 12월 12일

전남 강진군 사찰 탐방

- 제 2편 -

 

 

 

 

강진군 여행하며 출출할때 추천

설성식당

 

▲ 3인분 상차림으로 가격은 24,000원이다.(1인당 8,000원)

생각보다 반찬의 양은 적은 편이지만, 맛은 깔끔하다.

 

영랑생가에서 늦은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영랑생가로부터 13km 지점에 설성식당이 좋다는 정보가 있어 일단 달렸다. 맛집이라고 하여 찾아간 곳에서 나도 진정한 맛집으로 한 표 주기가 여간 쉽지 않긴 하지만, 일단은 속는 셈 치고 가 보기로 했다.

 

길에서 만난 설성식당은 겉으로 보는 것과는 달리 안으로 들어서니 꽤 넓었다.

(건너편에 주차장이 있으며, 설성식당 외 또 한 곳이 있다.)

 

음식을 주문하고 잠시 기다리자 문이 열리고 한 상 가득 차려진 밥상이 들어온다. 한 상 가득 이라지만 사실 큰 밥상은 아니었다. 음식도 그리 푸짐하지 않아 수저를 들기 전엔 조금은 실망하였으나 음식을 맛본 후 다시 밥을 바라보았다. 삭힌 홍어와 굴비 그리고 연탄불에서 구워낸 불고기와 젓갈까지. 모처럼 전라도 음식 한 상을 차려 받은 기분이었다. 가격은 2인은 2만 원이며, 3인부터는 1인당 8천 원이었다.

 

 

 

 

사적 제397

강진 전라 병영성

 

강진 전라 병영성이 처음부터 여행 일정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강진 맛집을 검색하다 찾은 곳이 전라 병영성 주변이었던 터라 밥을 먹고 잠시 들러 보게 된 것이다.

 

▲ 전라 병영성

 

전라 병영성은 현재 발굴 작업 중이었다. 질퍽해진 땅과 공사로 인해 잠시 성루에 올라 주변을 조망해 보기로 했다. 한눈에 동서남북 사방에 펼쳐져 있는 성문이 내려다보이는 평지형으로 규모가 제법 컸다. 병영성은 1999년 발굴을 시작으로 2003년까지 5차례 조사, 1999~2003년까지 남문, 동문, 서문 옹성 및 성벽을 복원하였다.

 

▲ 성벽 보수된 모습

 

전라 병영성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전라 병영성은 조선 1417(태종 17)에 초대 병마 절제사 마천목 장군이 축조하여 1895(고종 32) 갑오개혁까지 조선왕조 500년간 전라도와 제주도를 포함한 536진을 총괄한 육군의 총 지휘부였다수많은 역사와 일화 속에 민족저항 정신의 산 증거로 존속되어 왔으며, 1894년 동학 농민전쟁으로 불타고 곧 이른 갑오개혁의 신제도로 폐영되었다.

 

전라 병영성의 성곽 전체 길이는 1,060m이며, 높이는 3.5m, 면적은 93.139이다. 1997년 사적 지정 당시 성곽 내 육군 지휘부 시절의 건물이나 유적은 소실되었으며, 성곽만 일부 남아 있는 상태였다. 강진군의 지속적인 복원 정비사업으로 성문화 성벽의 복원은 마무리되어 가고 있다. 현재는 여장 복원공사 및 성 내부 주요시설 복원을 위해 발굴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강진 금곡사에서 석탑을 마주하다

 

 

▲ 일주문을 대신하고 있는 기암석

▲ 금곡사로 향하는 길의 겨울 단풍

 

 

봄이면 금곡사 주변 도로 19km 구간은 온통 벚꽃 길로 많은 탐방객이 찾는 곳이다. 산속 기암절벽 사이에는 나지막하게 자리 잡은 사찰이 있으니, 신라 말 밀봉대사가 창건한 후 '성문사'로 부르다가 이 일대 금광이 있어' 금곡사'로 개칭된 전통 사찰이다.

 

임진왜란 당시 승병의 훈련장소로 사용되었고 그로 인해 왜구의 침략으로 불타 버렸지만, 오늘날 금곡사 경내에는 보물 제829호 금곡사 삼층석탑이 오랜 세월의 역사를 품은 채 외로이 서 있다. 금곡사 대웅전은 무량수전이었으나 대웅전으로 바꾸었다.

 

▲ 김삿갓 시비

 

금곡사 입구에서 김삿갓 시비를 만난다. ‘쌍암병기의분쟁(雙巖並起疑紛爭) 일수중류해분심(一水中流解忿心) , 양편에 바위 우뚝 솟아 서로 다투는 줄 알았더니 물줄기 한 가닥으로 흐르는 걸 보니 근심 사라지네라 글을 남겼다.

 

 

▲ 대웅보전 앞에서 바라 본 입구 전경

 

▲ 금곡사 대웅보전

 

금곡사 안내문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신라 선덕여왕 때(632~647) 밀봉스님이 창건하였다고 전하는 금곡사는 거대한 석벽 사이에 고즈넉이 자리하고 있다. 그 정경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예부터 이곳을 방문한 시인 묵객들은 로서 그들의 감흥을 노래하곤 했다.

조선시대 방랑시인 김삿갓으로 더욱 유명한 김병연(1807~1863)도 이곳에 머물며 '쟁계암'이라는 거대한 바위와 그 사이로 계곡 물이 흐르는 평화로운 전경에 취해 시 한 구절을 남겼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금곡사 건물의 모습은 많이 바뀌었지만, 절 앞마당에 자리한 고려시대의 3층 석탑 만큼은 세존 진신사리 32과가 모셔져 있는 것으로 밝혀지면서 오랜 역사와 함께 부처님의 자비로움을 느낄 수 있다. 금곡사의 풍경은 강진을 대표하는 절경 중 하나로 사계절 내내 아름답지만, 봄날에 벚꽃이 만발하면 더욱 빛이 난다. 금곡사 뒷산에는 500년 된 야생 녹차밭이 펼쳐져 있어 다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맑고 차가운 자연수는 일 년 내내 마르지 않는다.’

 

 

 

보물 제829

강진 금곡사 삼층석탑

 

▲ 대웅전 앞에 자리한 금곡사 삼층석탑(보물 제829호)

 

강진 금곡사 삼층석탑(보물 제829)은 고려시대 석탑으로, 금곡사 경내 중심 법당인 대웅전 앞에 서 있다. 삼층석탑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금곡사 삼층석탑은 전체 높이 5m가 넘는 비교적 큰 탑이다. 양식적인 측면에서 보면 신라 시대의 전형적인 석탑양식을 고수하면서도 기단부 구성이나 옥계석 일부에서 백제계 석탑의 특징도 보인다. 이 석탑은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석탑은 단층 기단이며, 3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1층 탑신의 높이를 2층 탑신에 비해 3배 정도 높게 하여 전체적으로 안정적인 구도를 갖추고 있다. 두툼한 옥개석에는 급한 경사가 흐르고, 옥개석 밑에는 6단씩의 받침을 두었다.

 

 

특히 1층 탑신 사면에 작은 방형감실이 마련되어 있어 주목된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각 감실마다 작은 불상들이 봉안되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모두 사라지고 없다. 1988년 석탑 해체 복원 공사 중 3층 탑신 상면의 사리공에서 전신 사리 32과가 발견되었다.’

 

 

 

 

백련사에서 겨울 동백을 만나다

 

 

▲ 겨울 동백이 땅 위에서 또 한 번 피고 있다.

 

동백숲길을 따라 백련사로 들어선다. 12월 초순을 넘길 즈음에는 동백꽃이 제법 떨어져 탐방객을 반갑게 맞아 준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인 대흥사 말사 만덕산 백련사는 구강포에서 바라본 만덕산(萬德山)이 흡사 연꽃 한 송이가 활짝 핀 형상으로 큰 인물이 배출될 곳이라 하여 통일신라 생왕(文聖王,재위 839~856) 때 무염(無染,801~888) 스님이 창건하였다고 전하지만 확실치는 않다.

 

이후 희종 7(1211) 원묘국사(圖妙國師. 1163~1245) 요세(了世)에 의해 크게 중창, 고종3(1216)때 건물 80여 칸을 짓고 낙성법회를 열기도 하였다고 전한다. 고려 말 조선 초 왜구의 잦은 노략질에 폐사될 위기에 처했고 겨우 명맥만 유지되던 사찰은 세종 8(1426) 천태종의 영수이자 선종(禪宗)의 최고 등급인 도대선사(都大禪師)로 불리던 승려 행호(行秊)에 의해 효령대군(孝寧大君)의 도움으로 1430~1436년 중수 불사가 있었고, 광해군 13(1621)~인조 5(1627)을 거치며 옛 모습을 되찾았다. 그러나 영조 36(1760) 2월 화재로 소실되었고 이후 1762년 대법당을 중건하였다.

 

▲ 다산초당으로 향하는 산책로

 

일전에 동백꽃이 보고 싶어 무작정 친구와 함께 낯선 백련사를 찾아 나선 적이 있다. 그해 삼월 말경 지천에 피고 떨구어진 동백꽃을 보고 돌아온 후 봄이면 동백숲이 떠오르곤 하였다. 봄이 아닌 겨울 베롱나무 앙칼진 색감도, 능선길 진달래와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동백숲 붉은 꽃송이도 없는 백련사 겨울은 어떠할까. 만덕산 백련사 일주문을 시작으로 계단을 딛고 오른다. , 우 동백나무 숲이 진을 치고 있는데 이 일대 약 5면적이 천연기념물 제151호로 지정되어 있다.

 

▲ 백련사로 오르는 입구 동백숲길

 

고려시대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동백숲길을 따라 오르면 만경루에 도착한다. 이곳 만경루에서 내려다보는 바다의 경치는 매우 아름답다고 알려져 있으며, 3월이면 동백꽃이 지천으로 피어 숲 속에 숨바꼭질 하듯 흩어져 있는 부도를 감싼다. 문득 붉은 꽃망울로 만들어 낸 동백 화전이 생각난다. 강진 백련사 동백나무 숲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백련사 남쪽과 서쪽 구간의 5에 달하는 면적에 1,500여 그루의 동백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동백나무는 차나무과의 상록 교목으로 온대 지방을 대표하는 수종이며, 주로 남쪽 해안이나 섬에서 자란다. 동백꽃이 피는 시기에 따라 춘백, 추백, 동백으로 구분되며, 백련사 동백꽃은 대부분 이른 봄에 피어 춘백에 해당한다.’ 백련사 초입에서 동백숲길을 따라 해월루는 0.4km, 다산초당은 0.9km, 다산수련원까지 1.7km 구간이다.

 

▲ 백련사 대웅보전으로 향하는 입구 백일홍

 

진나라 혜원법사(慧遠法師. 332~414)가 루산산의 호계 동림사에 머물 당시 절에 백련을 많이 심었다 하여 '련사(白蓮寺)' 불리게 되었다. 신라시대에 정토왕생과 관음 신앙을 실천하던 여러 결사 중 정토왕생을 위한 염불 수행 도량으로 중국 동진 때의 고승 혜원이 동심사에서 염불왕생 결사를 하고 백련사로 부른 후, 오늘날까지 천년고찰의 품위를 지켜오며 열반경을 중시하고 있다.

 

 

또한, 이곳은 효령대군이 세종에게 왕위를 양보하고 8년간 머물던 곳이기도 하며, 고려시대 8분의 국사(원묘, 정명, 원환, 진정, 원조, 원혜, 진감, 목암)와 조선시대 소요, 해운, 취여, 화악, 설봉, 송파, 정암, 연파대사를 배출한 곳이다. 고려시대 8국사와 조선시대 8대사가 머물던 곳으로, 3월 말이면 백련사 주변 5.2km 구간에 약 7천여 그루의 동백나무가 숲을 이루며 붉은 꽃망울을 터트린다. 동백숲은 천연기념물 제151호이며, 8월 중순 백련사 만경루 앞 백일홍은 붉은 자태를 뽐내며 장관을 이룬다.

 

 

 

 전남유형문화재 제136호

백련사 대웅보전

 

▲ 백련사 대웅보전 전경

 

백련사 대웅보전은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36호이다. 1702년 중건된 전각으로, 정면 3, 측면 3칸의 팔작지붕에 원교 이광사(1705-1777)1763년 완도앞 신지도 귀향살이중에 들러 쓴 현판을 내걸고 있다. 대웅보전 수미단에는 조선 후기에 만든 작품으로 추정되는 목조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아미타불과 약사여래불 그리고 석가후불화인 영산회도 후불탱화가 내걸려 있다. 또한 대웅보전 내부에는 벽화 묘법연화경이 그려져 있으며, 대웅보전은 19724월 대웅보전을 중건, 2011년 대웅보전 중수 하였다. 불상은 1760년 화재 당시 화마 속에서 구해 낸 것이다.

 

▲ 백련사 본존불

 

백련사 대웅전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백련사는 만덕산에 위치하고 있어 조선 후기인 19세기에는 만덕사로 불렸다. 백련사는 신라 말에 창건되었다고 전하나 확실하지 않다. 고려 1232년에 원묘국사 요세(1163-1245)가 이곳에 보현도량을 개설하고 백련 결사를 일으켰다.

 

대웅전은 팔작지붕의 단청이 화려한 정면 3, 측면 3칸의 다포식 건물이며, 1762년에 건립되었다. 각 추녀마다 활주를 세워 건물을 받치고 있으며, 건물 전면 2개의 주두에 용머리 조각을 장식하였다. 대웅전 내부에는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목조 여래삼존상이 봉안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대웅전에는 중앙에 본존불인 여래상과 좌우에 보살상을 봉안하는데, 백련사의 경우에는 보살상 없이 여래삼존상만 봉안하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보물 제1396호

백련사사적비

 

경내를 둘러보면 2기의 탑비가 자리 잡고 있는데, 그중 보호각 내 자리한 사적비가 보물 제1396호인 백련사사적비이다. 사적비는 높이 4.47m이며, 용머리의 귀부는 고려시대에 만들었다. 숙종 7(1681)에 비신과 이수가 만들어졌는데, 그 이유는 아마 중간에 비석이 훼손되어 새로 만들어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 백련사사적비(보물 제1396호)

  

백련사 사적비는 숙종 7(1681) 탄기 스님이 절의 사적이 오래되어 사라질 것을 염려하여 세운 비석으로 다산 정약용이 감수하였다 한다. 만덕사지편 옛 비는 유실되어 알 수 없고 귀부만 남아 탄기스님이 다른 돌로 비석을 세우면서 옛 비석의 귀부를 사용했다고 주석을 달아 놓아 비석과 비몸돌이 다른 것으로 확인되며, 수염 달린 거북은 여의주가 없다.

 

백련사 사적비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백련사에는 고려 명종 때의 문신 최자(1188-1260)가 지은 원묘국사비 등 여러 개의 석비가 있었으나, 현재는 백련사 사적비만 남아 있다. 이 비는 1681(숙종 7) 5월에 세워졌으며, 비문은 홍문관 수찬을 지낸 조종저(1631-1690)가 찬하고, 남성군 이우(1637-1693)가 글씨를 썼으며 동생인 낭원군 이건(1640-1699)이 전서를 썼다.

 

 

 

비문은 모두 19형으로 이루어졌으며 1행은 45자로 구성되었다. 비의 옆면에는 백련사 중수, 원묘국사 행적, 백련결사 등의 내용이 새겨져 있으며, 뒷면에는 비 건립에 참여한 72명의 승려명과 인명이 음각되어 있다. 비문에 따르면, 백련사에 원래 원묘국사비가 있었으나 이수와 비신은 유실되었고 귀부만 남아 전해졌다고 한다. 이후 백련사 사적비를 세우면서 귀부는 옛 걸을 그대로 사용했다. 즉 백련사 사적비는 고려시대의 귀부에 17세기 후반의 이수와 비신을 갖추고 있는 셈이며, 1기의 비에서 고려와 조선시대의 양식적 특징을 동시에 볼 수 있는 특수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 만경루 내부 작품

만경루는 정면 5, 측면 2칸으로 대웅보전과 함께 당시 만경루 현판 역시 원교 이광사가 남겼다만경루 안에는 다양한 불교적 작품이 있으며, 만경루에서 강진만을 바라보면 가우도가 조망된다. 백련사 만경루에 오른 고려시대 혜일선사는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백련이라 이름난 절 아름답고, 만덕산은 맑기만 한데 / 문은 고요히 솔 그림자로 닫혀 있어, 객이 오면 풍경 소리만 듣네 / 돛단배 바다 위로 지나고, 새들은 꽃 사이를 날며 우짖으니 / 오래 앉으면 되돌아갈 길조차 잊을 만큼, 인간 세상의 흔적은 하나도 없네 / 고려시대 혜일선사

 

 

사찰에 있는 부도는 응진전 앞 1, 만경루 뒤 선방 앞 1, 절 입구 축대 위 1, 절 서쪽 동백 숲에 4기 등으로 총 7기가 있지만, 일부 부도의 주인은 알 수 없다. 선방 앞에 있는 춘파당 부도와 동백 숲에 있는 대웅보전 중수기를 기록한 스님으로 1804년 세우고 원묘국사중진탑으로 불리는 월인당부도 뿐인데 춘파당은 누군지 알 수 없다.

▲ 사찰에서 바라본 가우도

 

불교유적으로 백련사사적비(보물 제1396), 백련사동백림(천연기념물 제151), 백련사대웅보전(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36), 강진 백련사원구형부도(시도유형문화재 제223)가 있다.

 

▲ 백련사를 내려서면서

 

201512월, 현재 만덕산 백련사에 심상치 않은 분이 칩거 중이다. 손 전 고문이 머물고 있는 강진 백련사 토굴로 큰 인물이 배출되는 이곳 만덕산을 찾은 이유 있는 셀프 유배이자 칩거로 보인다.

 

 

 

 

스쳐가는 길 가우도를 만나다

 

▲ 가우도로 건너는 출렁다리

 

강진여행 중에는 가고 싶은 섬으로 선정된 가우도를 잇는 출렁다리를 가보라 하였다. 마침 도로변을 따라 이동하다 만난 가우도 출렁다리를 한번 거닐어 본다. 가우도란, 소의 멍에를 닮아서 불리게 된 지명이라 하며, 가우도 탐방로는 약 2.4km 구간이다. 가우도를 잇는 교량으로 저두~가우도 구간은 438m 사장교 방식이며, 반대편 망호~가우도 구간은 716m 현수교이다.

 

 

강진 명소 제8호 가우도는 '향기 나는 섬'이라 하였다. 또한, 가우도가 소의 멍에를 닮았다 하여 교량을 지탱하는 구조물의 디자인이 쇠뿔 형상을 하고 있다. 그런데 다리를 건너면서도 계속 출렁다리를 찾아야 했다. 알고 보니 전혀 흔들리지 않는 다리를 두고 출렁다리라 부르고 있었다. 섬에는 서너 채의 집이 모여 사는 작은 마을이 있다.

 

  

 

까막섬과 마도진성

▲ 전망대에서 바라본 까막섬 전경

 

까막섬은 상록수림이 모여 자라 멀리서 보면 푸르다 못해 검게 보인다 하여 '까막섬'으로 부른다는 이야기와 까마귀가 많이 살아 까막섬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까막섬은 큰 까막섬과 작은 까막섬 등 2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섬에는 후박나무와 돈나무 등 약 100여 종의 열대성 상록수종이 자라 천연기념물 제172호로 지정되어 있다.

 

 

까막섬이 움직인다? 이 무슨 기묘한 이야기란 말인가. 물론 실제 기록은 아니다. 까막섬에 관한 전설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까막섬은 원래 적도 부근 남태평양에 있었는데 강진까지 찾아왔다고 한다. 남태평양에서 강진까지 온 이유는 육지가 되고 싶은 간절한 생각 때문이었다고 한다. 마침내 기나긴 여정 끝에 마량에 닿을 무렵이었다. 바닷가에서 까막섬을 바라보고 있던 아이 업은 여인이 "발 없는 섬도 걸어 다니는데 내 아들은 두 발이 있어도 걷지를 못하는구나!"라며 땅이 꺼지도록 탄식하였다. 여인에게는 걷지 못하는 아들이 있었던 것이다. 섬은 이 말을 듣더니 이동을 멈추고 지금 그 자리에 머물기로 하였다. 신기한 것은 섬이 멈추자 곧 여인의 아들은 걸을 수 있게 되었다 한다.

 

까막섬은 육지가 되고 싶다는 꿈을 위해 머나먼 길을 떠나왔지만, 여인의 아들에게 걷는 능력을 주고 자신은 눈앞에 육지를 두고 멈추어버린 것이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타인의 꿈을 이루어주기 위해 정진해온 자신의 꿈을 접는다는 것이 얼마나 갸륵한 일일까그로 인해 까막섬은 육지의 끝자락이 되지 않고 타인의 꿈을 이루어준 위대한 작은 섬으로 남았다. 까막섬을 바라보며 "잘했구나, 잘했어." 하고 말을 건네어 보라. 다리나 발이 아픈 사람이라면 까막섬이 낫게 해줄 것이다.

 

▲ 마도진성

 

까막섬 전망대 도로 건너에서 마도진성을 만날 수 있다. 마도진성(마량마도진성지)에 관한 안내글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1597820일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순항하는 모습을 바라보기에 좋은 곳이다. 이곳 마도진성은 '말머리'라 불리는 마량 관문에 위치하고 있다. 여지도서에 둘레가 890척이며 높이가 12척으로 해상 방어 병참기지였던 이곳은 전라도 내륙인 강진, 장흥, 해남, 영암으로 이어지는 해상요충지로서 정유재란 중 이순신의 부대와 명나라 전란의 부대가 연합 작전을 전개했던 곳이다.’

 

 

안정호 작가

http://blog.daum.net/okgo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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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지 않아 오르기 수월한 장흥 억불산 (2016-01-20 14:12:41)
전남 강진군 사찰탐방 제1편 (2015-12-18 12:4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