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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대가야의 도읍지 '고령(高霊)'

경북 고령 여행
등록날짜 [ 2016년01월11일 15시19분 ]
 
 
 
 
경북 대가야의 도읍지 '고령(高霊)'
 
 
 
 
대가야국의 도읍지 경북 고령군과 지산동 고분길/ 이하 김종성
 

경북 고령은 대구시와 접해 있으며 인구 3만 6천여 명의 작은 도시지만, 철(鐵)과 도기(陶器)의 왕국이자 대가야의 도읍지였던 찬란한 역사와 문화의 도시이다. 왕국의 유적이 모여있는 고령군 고령읍은 얼마 전 고령군 대가야읍으로 지명까지 바꿨다. 
 
1500년 전(42~562년) 대가야의 도읍지로서 강력한 철을 바탕으로 고구려, 백제, 신라에 못지않은 강성한 힘과 문화를 꽃피웠던 도시 고령. 고령군청을 중심으로 반경 2km 이내에는 대가야 박물관을 비롯한 왕릉전시관, 지산리 대가야고분군, 대가야 역사 테마관광지, 우륵박물관, 가얏고마을, 개실마을 등의 다양한 관광지가 조성되어 있다. 고령은 우리나라 3대 악성 중 한 사람인 '우륵'의 출생지이자, 주요 활동지역이기도 했다. 
 
'가야'는 기원 전후부터 서기 562년까지 주로 경상북도 낙동강 하류 일대에서 번성했던 소규모 국가들을 총칭해 부르는 이름이다. 구체적인 기록이 전해지지는 않아 ‘신비의 왕국’으로 불리는 연맹체 국가이기도 하다. 고령 지역의 대가야, 김해의 금관가야, 함안의 아라가야, 함창의 고령가야, 성주의 성산가야, 고성의 소가야, 창녕의 비화가야가 그 나라들이다. 
 
  16대 도설지왕(道設智王)까지 약 520년 동안의 찬란한 역사를 이어온 대가야는 562년에 신라 진흥왕이 이사부(異斯夫)와 사다함을 앞세워 공격해오면서 멸망했다. 대가야는 멸망하기 전까지 정치·문화 영역에서 가야중의 최전성기를 이끈 나라이다. 순장문화, 철기 문화, 가야금, 토기 등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해 고대문화 발전에도 크게 이바지했다. 

6세기까지 대가야의 도읍지로 번성을 누렸던 고령(高靈)은 영남의 젖줄 낙동강과 가야산이 둘러싸여 있는 곳이다. 높을 고(高), 신령할 령(靈). 지명 자체만 봐도 신령한 곳임을 짐작할 수 있다. 예로부터 양반들이 살기 좋은 곳이라 불렀으며,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종자 한 말을 뿌리면 고령에서는 흉년이 들어도 최소 80말은 나온다’고 기록될 정도로 토양이 비옥했고, 물이 풍성했다.

* 기차를 이용한 교통편 : 대구역 - 대구 서부 정류장 (1호선 성당못역 앞 ), 고령행 버스 - 15분 간격 (30분 소요) 

 

 


평평한 경주 고분길과는 사뭇 다른 고령의 고분길 - 고령군청 안내집 사진 

 

 

 

가야지역 최대의 유적

고령 지산동 고분군

 

 

지산동 고분군 주변에는 서쪽에서 고령을 감싸고 있는 산과 700기가 넘는 크고 작은 무덤들이 언덕 곳곳에 무리를 짓고 있다. 능 사이로 난 길을 걷다 보면 멀리서 보든 가까이서 보든 장관이다. 대가야의 왕과 왕족, 귀족들이 묻힌 공동묘지이자 신성 구역으로 대가야의 융성을 무언으로 말해주는 대표적인 유적이다.

 

지산동 고분군은 대가야국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이 고분이 발굴되면서 묻혔던 가야사가 드러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가야 지역 최대의 고분군으로 탁월한 경관과 순장을 비롯한 독특한 장례문화, 토목기술의 우수성 등을 인정받아 201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우선 등재 대상으로 선정되었다니, 머지않아 세계문화유산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삼국 시대에 백제나 신라와 힘을 겨루었던 막강한 나라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역사적 실증이 부족해 삼국 역사의 뒤편에서 잊혀야만 했던 도시 고령. 그렇게 잊힌 듯 보였던 대가야와 고령이 최근 새롭게 부각된 것은 고령 지산동 고분군을 비롯한 대가야의 문화유산들 때문이다.

 

지산동 고분군은 먼발치에서 눈으로 보기만 하는 유적이 아니다. 직접 고분 사이를 걸어 다니며 몸으로 체험하는 살아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현재 사적 제7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문화재 보존 및 방문자들을 위한 대가야 왕릉전시관을 운영하고 있다.

 

 1977년부터 발굴한 32-35호 고분에서는 철제 투구, 갑옷, 금동관 등이 출토되어 지배계급의 무덤으로 밝혀졌고, 44-45호 고분은 고대 사회의 순장 제도를 보여주는 귀중한 유적지로 평가되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로 확인된 순장묘다. '순장'이란 어떤 사람이 죽었을 때 그를 위해 살아있는 사람이나 동물을 죽여서 함께 매장하는 장례 행위다. 산 사람을 죽여 다른 사람의 장례에 사용한다는 것은 강력한 권력을 소유한 통치자 집단의 지배력을 반영하는 것으로, 특히 고대사회에서 널리 성행했던 풍습이다. 이는 사람이 죽은 뒤에도 삶이 계속된다고 믿었던 고대인들의 계세(繼世)사상에 따라 이승에서의 생활을 저승에서도 그대로 누리라는 의미에서 이처럼 행한 것이다. 

 

 


대가야 왕릉전시관에서 능을 상세하게 살펴볼 수 있다 / 이하 김종성

 

대가야의 무덤들을 옆에 끼고 고령 시내를 내려다보며 산책을 한다. 크기가 조금씩 다른 무덤들 사이사이로 걷는 기분이 꽤 이색적이다. 동네 뒷산을 걷는 것처럼 자연스럽고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능선을 따라 고분군을 한 바퀴 돌아보면 1시간가량 걷게 된다. 능들은 신라의 도읍지 경주에서처럼 모두 주인 없는 무연고 무덤인데, 도굴을 우려해 묘비를 세우지 못했다고 하니 그 사연이 참으로 허망하다. 

 “청일전쟁 이후 일확천금을 꿈꾸고 온 일본인들이…무덤 속에 금사발이 묻혀있다든가 혹은 금닭이 운다든가 하는 전설을 퍼뜨리며….” (<조선> ‘고분발굴만담’, 1932년) 

수백 기의 크고 작은 능들은 대가야의 왕과 귀족들의 무덤일 것으로 추정된다. ‘추정된다’고 하는 까닭은 고분이 거의 도굴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제 강점기 때 우리나라에서 자행된 도굴 극심했다. 일제하 경주 금관총을 발굴했던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는 일본인들에 의해 자행된 무자비한 도굴 행각을 개탄하는 글을 발표했다. 일본인조차 낙랑고분과 가야고분, 고려고분 등이 무차별 싹쓸이 도굴로 난도질당하는 모습을 안타까워했던 것이다. 이렇게 일본인마저 한숨 쉰 이 아수라장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고분이 4세기~6세기 신라 시대의 묘제인 '적석 목곽분' 혹은 '돌무지 덧널' 형식의 무덤이다. 널무덤(관)에 널을 덧댄 것이 덧널무덤(곽)이다. 관을 넣을 수 있는 더 큰 관을 만드는 것. 한마디로 이중구조의 무덤이라고 할 수 있다.

돌로만 쌓은 고구려, 백제의 적
석총과는 달리 이 시기 신라 무덤은 관을 묻고 그 위에 자갈돌과 흙을 차례차례 두텁게 쌓은 형태였다. 돌과 흙의 양은 상상을 초월해 도굴을 원천 봉쇄했다. 도굴하려면 갱도를 뚫어야 하는데, 엄청난 돌과 흙을 감당할 수 없는데다 곧 무너져서 생매장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돌과 흙이 무너져 내려 목관과 완전히 밀착됐기 때문에 관속의 유물을 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나무 덧널 형식의 무덤이지만, 지산동 고분에도 유일하게 도굴범들 마수를 피해 온전히 살아남은 고분(73호)이 있다. 

 


지산동 고분군 아래 자리한 대가야 박물관 
 
 
 
 
대가야국의 문화와 역사를 만날 수 있는
대가야 박물관
 
'대가야 박물관'은 왕릉이 모여있는 주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곳으로 대가야 왕릉전시관과 함께 국내 유일 대가야 전문 박물관이다. 2005년 4월에 개관한 대가야박물관은 대가야의 역사와 문화를 중심으로 구석기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고령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대가야 박물관은 대가야 왕릉 전시관과 대가야 역사관으로 나뉜다. 무덤처럼 동그랗게 돔 모양을 한 대가야 왕릉 전시관은 마치 무덤으로 들어가는 느낌마저 든다. 실물 크기로 복원된 무덤으로 들어 가 무덤의 구조와 축조방식, 주인공과 순장자들의 매장풍습, 부장품의 종류와 성격 등을 직접 볼 수 있다. 당시 여러 고대 국가의 무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순장풍습은 살생을 금하는 불교가 전해오면서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맞은편에는 대가야 역사 테마 관광지(www.daegayapark.net)가 들어서 있다. 이곳은 대가야와 관련된 다양한 체험형 전시관을 비롯해 펜션과 물놀이장, 캠핑장, 놀이터, 야외무대 같은 시설을 갖춰 미니 테마파크 역할도 겸한다. 안으로 난 산책로 쪽을 따라 자리한 통나무 펜션과 산등성이에 조성된 야영장도 이용할 수 있다.
 
지산동 고분군을 배경 삼아 들어선 시설들 모두 한적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다.
 
 
 
대가야 시대의 화려한 금관 
 




 
수목원과 펜션, 야영장도 갖춘 테마파크. 대가야 테마 관광지
 
 
대가야 박물관은 대가야의 역사를 중심으로 고령지역의 역사를 한눈에 알 수 있도록 구석기시대부터 근대에 이르는 역사 문화에 대한 설명과 유물을 전시해놓은 곳이다. 대가야박물관은 1층 기획전시실, 2층 상설전실로 구성되어 있다. 기획전시실에서는 해마다 주제를 바꿔 1년간 새로운 유물들을 전시한다. 지산동 44호 고분에서 출토된 인골 전시, 7가야의 토기 비교전, 나무덧널 형식의 무덤이었던 까닭에 유일하게 도굴범들의 손을 피해 온전히 살아남은 73호 고분 출토물 등을 선보였다. 일본이 반출해간 가야의 유물들을 주제로 한 전시회가 열리기도 했다. 2층 전시실에서는 선사 유물들과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만날 수 있다. 

대가야 박물관 옆으로는 국내 최대 순장묘인 44호 고분(1977년 발굴) 내부 모습을 고스란히 재현해 놓은 왕릉전시관이 있어 함께 둘러볼 만하다. 40여 명이 함께 묻힌 대형 고분이다. 박물관 해설사는 “유골 조사로 묻힌 이들의 나이를 알 수 있는데, 8살짜리 아이를 안고 있는 어른도 있었다”며 “모두 유골 뒷머리가 깨져 있는 것으로 보아 묻히기 전에 타살된 듯하다”고 말했다. 이 고분에서 출토되고 백제에서 조의품으로 보내온 금동함과 등잔, 오키나와에서 생산된 야광 조개 국자(부서진 조각)도 전시되어 있다. 또한, 왕릉 축조 과정도 살펴볼 수 있다. 
 
 
 
 
대가야의 역사와 문화 체험의 장
가얏고 마을과 개실마을
 
 
가야금을 연주하고 있는 우륵 동상이 반기는 고령 가얏고 마을(고령군 고령읍 쾌빈리 정정골 www.gayatgo.net )에 가면 은은하고 청아한 가야금 소리가 흘러 나온다. 고령읍 쾌빈리의 금곡(琴谷)은 속칭 '정정골'이라고도 불리는데, 우륵이 제자들과 함께 가야금을 연주한 곳으로 가야금 소리가 정정하게 들렸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란다. 아리랑 가락이 들리기도 하고 때로는 민요 산조 한 자락이 구슬프게 들려 오기도 하는 곳. 가야금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가야금 역시 대가야 시대의 산물이다. 
 
가얏고 마을은 대가야의 대표적인 인물인 우륵 박물관, 가야금 공방, 문화관, 체험관이 있어 가야금 문화를 발굴 및 보존하고 있다. 
 
 
 
가야금을 쉽게 배울 수 있는 가얏고 마을
 

가야금을 만들던 금장지가 있는 가얏고 마을
 
  
대가야 말기의 가실왕은 우리나라 3대 악성(樂聖-우륵, 박연, 왕산악) 중 한 명인 우륵으로 하여금 중국의 현악기 쟁(箏)을 본따 12현금인 가야금을 만들고 작곡과 연주를 하였다. 또한, 여러 지역에서 사용되는 악기를 가야금의 형태로 통일시키고 각 지역의 음악적 특성을 담은 12곡의 노래 '가야금 12곡'을 짓게 하였다 한다.
 
우륵과 가실왕은 대가야 551년 국운이 기울었던 그때 왜 가야금을 만들었을까? 가실왕은 흩어진 7개 가야를 소리를 통해 통일해 보고자 가야금이라는 악기를 만들고 우륵에게 곡을 쓰라 명하였다. 즉, 가야금은 소리로 통일을 이루려는 가실왕의 염원이 담긴 악기였다.
 
<삼국사기> ‘악지(樂志)’에는 ‘가야국 가실왕이 중국의 악기를 보고 가야금을 만들었으며, 가야 여러 나라의 방언이 각각 달라 소리음(聲音)을 하나로 하기 위해 성열현(省熱縣) 출신의 악사(樂師) 우륵에게 명하여 가야금곡 12곡을 만들게 하였다’고 기록돼 있다. 
  
우륵은 대가야 가실왕의 실정(失政)이 싫어 신라로 망명하여 당시 음악이 부재했던 신라 음악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하고 대접받았던 행복한 음악인이었다.  고려와 조선시대 음악가들은 사농공상에도 못 들어가는 양천조차 되지 않는 천민이었기 때문이다. 고려와 조선시대 궁 내외의 음악을 담당하는 음악가들은 '악공(樂工)' 내지는 '악생(樂生)'이라고 불렸다. 이들은 천민으로 태어나 죽을 때까지 천민으로 살았고 그 자식들도 천민이 되었다. 극히 일부의 시기를 제외하면 아무리 국가에 공훈을 세워도 양민이 될 수 없었다. 19세기 이전까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유명한 작곡가가 몇 안 되는 이유다. 
  
현재 이곳 박물관에는 '우륵 국악기연구원'도 함께 있어 가야금을 만드는 일부터 국악기의 연구, 제작, 보급에도 힘쓰고 있다. 박물관 우측에서는 오동나무를 켜 말리고 있는 모습이 가히 장관이었다. 3~5년을 노지에서 말린 오동나무는 상태가 좋은 10% 정도만 악기 제작에 사용된다고 한다. 가야금은 오동나무를 통째로 깎아 만드는데, 위판은 하늘, 아래 판은 땅을 상징하며 중간에 공간은 사람이 사는 삼라만상을 뜻한다고 한다. 12줄은 1년 즉, 12달을 의미하는데, 1600년 전 이미 12달을 뜻하는 12줄을 생각해 냈다는 게 매우 놀랍다. 가야금의 머리는 양이두(羊耳頭) 즉, 양의 머리를 형상화한 것이다.
 
평소에 흔히 접하기 힘든 가야금이지만, 이곳에서는 직접 연주를 하며 체험해볼 수도 있다. 30분만 배워도 아리랑 한 곡조는 탈 수 있다. 연주하기 어려운 악기라는 이미지와는 달리 아이들은 물론 악기에 문외한인 어른들도 아주 쉽게 연주할 수 있도록 쉬운 방법으로 가르쳐 주고 있어 더욱 좋았다. 
 
  

 한옥민박과 민속놀이 체험을 할 수 있는 '개실마을'
 

 
 
 
'꽃피는 아름다운 골짜기'라는 뜻의 개실마을 (고령군 쌍림면 합가1리 www.gaesil.net한옥에서 숙박을 했다. 마을 입구로 들어서면 넓은 운동장이 먼저 반기고, 그 뒤편으로 고택과 황톳빛 돌담이 마을을 따라 이어지고 있다.
 
개실마을은 지금으로부터 350여 년 전 김종직의 5대손이 처음 들어와 은거한 후 대대로 살아온 일선 김씨 집성촌이다. 영남학파의 종조인 점필재 김종직 선생은 원래 밀양 사람이었지만, 1498년(연산군4) 벌어진 무오사화 때 화를 면한 후손들이 이곳에 정착하게 된 것. 종택과 사당을 중심으로 13대가 넘게 종가가 대를 이어오고 있다. 

무오사화는 1457년(세조3)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이 빌미가 되어, 유자광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에 의해 김일손 등 신진사류가 화를 입은 사건이다. 김종직은 부관참시(무덤 속 관을 꺼내어 시신의 목을 베는 형벌) 되었다.  조의제문(弔義帝文)은 항우에게 죽은 초나라 의제(義帝)의 억울한 죽음을 애도하는 내용으로, 세조에게 죽임을 당한 단종을 의제에 비유하여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난한 것이다. 후에 제자인 김일손이 사관으로 있을 때 이글을 <성종실록>에 적어 넣었다.   

개실마을은 마을의 80%가 한옥이고 한옥을 개량한 민박집(14동)이 있어 하루쯤 머물며 푸근한 농촌의 정취를 느끼기에 좋다. 한옥 민박집에서 하루를 묵으며 오랜만에 평화롭고 한적한 시골 마을을 경험했다. 한옥 마당을 거닐다 툇마루에 앉아 동네 어귀 축사에서 들려오는 소 울음소리, 방바닥을 기어 다니는 귀여운 무당벌레에 왠지 마음이 한없이 아늑하고 편안해졌다. 마을에선 아이들이 더 좋아할 전통 체험을 할 수 있도록 다양한 프로그램도 마련되어 있었다. 이번에 방문했을 땐 엿을 직접 만들어 보았는데, 이외에도 대나무총 만들기, 짚 공예, 미꾸라지 잡기, 고구마 수확체험, 엿과 유과를 직접 만들어 보는 전통 음식 체험, 뗏목과 얼음 썰매 타기 등 계절별로 민속놀이 체험을 할 수 있다.  
 
  

 
 
김종성 작가
경상북도>고령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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