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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 삼학도로 떠난 여행

전남 목포시 삼학도 여행
등록날짜 [ 2016년05월20일 17시07분 ]

 
 
목포 삼학도로 떠난 여행
 
- 1960년대 간척공사로 육지화 되기 전의 삼학도 모습 (목포시청 누리집 사진)

 

 

전남 목포 앞바다에는 삼학도(전남 목포시 삼학동)라는 섬이 있다. 바다가 끝나고 강이 시작되는 곳에 대자연이 아담한 봉우리 셋을 앉혀 놓았던 이 섬은, 유달산과 함께 목포의 대표적인 명승지였다. 

 

1960년대에 매립되어 육지가 된 삼학도에는 목포의 근현대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옛날엔 배를 타고 건너가 유희를 하고 사랑을 다짐하던 공원과도 같은 항구의 섬이었다는데, 현재의 모습을 보면 믿기 힘들 정도다. 당시 섬의 넓이는 동쪽의 가장큰 섬이 약43,000평이고, 가운데섬이 13,000평, 서쪽섬이 7,000평으로 제일 작았다.

목포역에서 내려 단선 철길을 따라 삼학도를 향해 갔다. 목포역과 삼학도 사이를 연결하는 기차길인 삼학도 철길은 실제로 분류하기는 한국제분선, 석탄부두선, 삼학선 등 여러 갈래로 갈라지지만, 큰 줄기는 목포역에서 나와 삼학도 쪽으로 가기 때문에 흔히들 '삼학도 석탄철도'라고 불렀다. 이채로운 이 철길은 공원화가 진행되고 있다.  

 

 


목포역에서 삼학도를 오갔던 단선 철길 


1872년  ‘무안목포진’에 표시된 삼학도가 처음으로 지도에 그려졌다. 이유는 군사요충지 목포진은 세종 1439년 설치되었고, 성이 완성된 것은 1502년. 목포진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땔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삼학도는 땔나무를 제공했던 중요한 장소였다. 

1897년 목포항이 일본인에 의해 개항되자 많은 상인들이 몰려들고 외국 문물과 잡화 등이 성업을 이루었다. 삼학도에는 역시 사람이 들어가 살았다. 1928년 유달산이 공원으로 지정되면서 이 섬에도많은 관광객이 몰려와 낚시와 놀이를 즐겼었다.

이 섬들이 모습을 바꾸기 시작한 것은 6·25직후인 1954년의 일이다. 목포항이 비좁고 대형선박의 정박이 어려웠기 때문에 10,000톤급 이상의 선박을 정박시키고자 신항공사를 착수했다. 3년만에 삼학도는 육지가 됐다.1962년에는 이로면 입암리와의 사이가 매립되어 완전히 섬으로써의 모습을 잃어 버렸다.

목포의 '목'은 여울목, 길목 할 때 그 목이다. 목포는 서해와 남해 바닷길 길목에 있는 포구였다. 해안선이 복잡하고 뻘이 깊어 사람 살기보다는 군사 요충지로 역사가 오래다. 그래서 목포 역사는 매립의 역사다. 바다를 메워 집을 짓고 뻘을 덮어 큰 배가 정박할 항구를 만들며 목포가 성장해왔다. 목포 땅 80%는 바다였다. 호남선 목포역 또한 바다 한가운데에 있었다.

 


- 1960년대 뭍으로 변했다가 2000년대 들어 힘들게 복원한 삼학도


개발의 시대였던 1960년대엔 땅 한 평이 아쉬웠다. 늘어나는 인구로 인해서 팽창하는 도심을 감당하기 위한 대안으로 삼학도 매립에 대한 논의가 일어났다. 1956년 삼학도 제방 축조 계획이 수립됐고 1960년대에 제방 축조 및 매립 공사가 진행되다가 1965년에 이르러 마침내 삼학도는 육지화 되었다. 전기가 가설되고 공동수도가 들어간 후 산업시설과 항만시설도 들어왔다. 세 섬 외곽에는 둑을 쌓고 그 안쪽 바다를 메워 100m 이상 떨어진 육지와도 연결했다.

매립 토사를 대느라 섬의 산 일부를 깎기도 했다. 삼학도는 더 이상 섬이 아닌 뭍으로 변해갔다. 그 자리엔 공장, 조선소, 부두와 골재, 원목 야적장 등이 들어섰다. 유달산(해발 228m)과 함께 목포를 상징했던 삼학도가 난개발에 밀려 흉물지대가 된 것이다.

 

목포시가 이를 뒤늦게 후회하고 삼학도 일대 57만4850㎡를 복원해 공원으로 되살리기로 결정한 건 2000년대 들어서다. 2004년부터 복원 공사에 들어가 근 10년의 공사끝에 이제 상당 부분이 시민의 품으로 되돌아왔다.

 

 


- 삼학도 앞 부두에 자리한 어선들


중·소 삼학도 사이에 길이 760m, 폭 20~40m, 깊이 2m의 수로를 파 총 길이 2142m의 물길을 만들고 바닷물을 끌어들였다. 대·중·소 삼학도가 과거 각각 바닷물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만든 것이다. 원래 낮았지만 토사를 채취하느라 깎기까지 하는 바람에 거의 평지가 된 소삼학도 자리(3600㎡)는 10만㎥의 흙을 쌓아 동산을 만들어 섬 모습을 재현했다. 대삼학도(10만4000㎡)와 중삼학도(4만1000㎡) 또한 절개지들을 흙으로 덮고 나무들을 심었다.

'국민의 정부' 시절인 2000년 초부터 무려 1243억 원을 들였다니, 무리한 간척사업 개발의 대가를 나중에 다시 치르게 된 셈이다. 섬 자체가 파헤쳐져 평지가 돼버린 삼학도를 되살려내기 위해 흙과 자갈로 원형에 가깝게 봉우리를 만들고, 그 사이에 길이 760m에 이르는 물길을 냈다. 물길을 따라 오솔길과 자전거 도로를 놓아 섬을 한 바퀴 돌아보기 좋았다. 오랜 노력 끝에 섬에서 뭍으로 바뀐 삼학도가 다시 섬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삼학도 건너편에 있는 목포종합수산시장


육지와 맞다은 섬 앞에 펼쳐진 썰물 때 드러난 개펄을 보고 "저게 논이라면" 했던 말했던 사람들과, 망가진 삼학도를 원통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사실 같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변덕을 탓할 수는 없다. 한 시절, 이 나라의 두뇌가 사람들에게 제시할 수 있는 전망이 그것밖에 없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목포 시민들이 삼학도를 파괴하는 일에 동참했다기 보다는 가난과 개발의 볼모로 잡혀 동원되었을 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바닷가에 사는 소나무 곰솔 등 나무들도 많이 심어 놓아 주민들이 산책이나 운동 삼아 많이 찾고 있었다. 목포 어린이 바다 과학관과 김대중 노벨평화상 기념관도 들어서 있다. 무료라서 들어가보게 된 김대중 노벨 평화상 기념관, 요즘처럼 민주주의가 퇴행하는 시대에 그가 있었다면 무슨 말을 들려줬을까 궁금하고 착잡한 마음에 기념관을 잠시 서성였다. 

 


삼학도에 자리한 김대중 노벨평화상 기념관



항만시설, 산업시설이 떠난 삼학도에 자리한 어린이 바다 과학관.


목포만큼 대중가요의 노랫말로 유명해진 항구도 드물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고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란 〈목포의 눈물〉이 그렇고 〈목포행 완행열차〉, 〈목포는 항구다〉 등등 목포를 무대로 하는 가요는 아직도 우리 귓전에 생생하다.

삼학도에는 우리나라 수목장 1호인 이난영 여사의 수목장과 기념공원이 있다. 수목장이란 죽은 유해를 화장한 뒤 뼈가루를 나무뿌리에 뿌리는 장례방식이다. 목포 출신 문일석 작사의 노래 '목포의 노래'를 부르게 된 것이 노래의 여왕 이난영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목포의 눈물은 이난영 특유의 목소리와 우리의 한이 서린 가사로 지금도 널리 애창되고 있다. 특유의 콧소리와 애간장을 끊어내는 노래에 일제 강점기 때 겪은 한과 호남의 아픔이 녹아있는 듯했다. 

김종성작가 http://sunnyk21.blog.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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