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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물이 된 서울 종로구 창의문

등록날짜 [ 2016년06월28일 16시46분 ]
 
국가보물이 된 서울 종로구 창의문
 


 

▲ 북악스카이웨이 서울 성곽길을 오르는 시민들에게 친근한 창의문

ⓒ김종성


서울 한양도성에 있는 4개의 소문(四小門) 가운데 하나인 창의문(彰義門)은 자전거 애호가들에게 친숙한 문이기도 하다. 자전거를 좀 탄다 싶을 때 달려가게 되는 필수 라이딩 코스 가운데 하나인 북악스카이웨이(또는 북악산로)의 들머리에 있기 때문이다.

 

북악스카이웨이는 경복궁, 청와대를 품은 진산 북악산에 나있는 길로, 종로구 부암동에서 성북구 종암동 까지를 잇는 산중도로다.

박정희 정권 시절 청와대 경호 목적으로 생겨나 이젠 차들이 다니는 풍광 좋은 관광도로지만, 자전거족에게도 사랑받는 길이다. 경치도 좋고 구불구불, 오르락내리락 언덕길이 자전거 라이더에게 고통과 짜릿함, 도전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북악산로의 정점에 전망대이자 쉼터인 팔각정이 자리하고 있다.

세종대로를 지나 경복궁과 청와대를 바라보며 그 옆길을 달려 부암동 언덕길을 오르다보면 창의문 고개(혹은 자하문 고개)에 이른다. 고갯길 위로 이어진 북악스카이웨이 진입로 입구에 창의문이 잠시 쉬어가라며 여행자를 반긴다. 서울 성곽길이 지나는 북악산과 인왕산길 사이에 있어 성곽길을 걷는 시민들에게도 익숙한 곳이다. 

 

창의문은 인근 주민들에게 자하문(紫霞門)이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가까이에 골이 깊고 물과 바위가 아름다웠던 '자하골'이라는 마을에서 딴 이름이라고 한다. 아직도 '자하문 터널', '자하슈퍼' 등의 이름이 동네에 남아있다.

 
기사 관련 사진

▲  창의문 옛 풍경(1910)

                                                                               창의문 안내소내 사진 촬영

 

 


4소문 가운데 유일하게 원형을 유지한 문 


역사적 가치가 높아 국가지정 사적지였던 이 문은 지난 2015년 12월 국가지정문화재 보물(제1881호)이 되었다. 4소문 가운데 유일하게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점이 작용했다고 한다.

 

서울엔 4개의 대문과 4개의 소문, 총 8개의 문이 있다. 창의문은 돈의문(서대문)과 숙정문(북대문) 사이에 위치한 북소문으로 '올바른 것을 드러나게 하다'란 멋있는 뜻을 품고 있다. 서울성곽이 처음 축성된 태조 5년(1396년)에 만들어진 아주 오래된 문이다.

북대문인 숙정문이 있었음에도 실질적으로 북문(北門) 역할을 했던 게 바로 창의문이었다. 북악산의 험한 지형 위에 세워진 숙정문은 사람의 발길이 뜸했을 뿐더러, 1413년부터는 그마저도 폐쇄 시켰다. 1413년 풍수 전문가 최양선이 숙정문이 지맥을 손상시킨다는 상소를 올린 뒤 문을 폐쇄하고 성곽길에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시켰다.

또한 숙정문이 음양오행 가운데 물을 상징하는 음(陰)에 해당하는 까닭에 나라에 가뭄이 들 때 면 기우제를 열고 비가 많이 내리면 문을 닫았다고 한다. 게다가 이 문을 열어 놓으면 장안의 여자들이 음란해진다 하여 항상 문을 닫게 했다니 우리나라 사람들이 옛 부터 얼마나 풍수를 신봉했는지 알만하다. 

 

▲서울의 4개 소문 가운데 유일하게 원형이 남아있는 창의문

                                                                                                                                 ⓒ김종성

 

일반인들, 상인들이 주로 드나들었던 다른 도성문과 달리 창의문은 군사시설의 관료와 군인, 조지서(조선시대 종이를 만들던 곳)의 관료와 장인, 제지업과 포백업에 종사하는 주민들 등이 많이 드나들던, 18세기 도성방어를 위한 요충지기도 했다.

그래서였을까 창의문엔 유독 파란만장한 역사의 이야기가 많다. 이 문은 조선왕조 500년 역사동안 수많은 개폐를 반복하면서, 각종 전란과 반란의 중심에 있었다. 근현대사에 들어서는 간첩 침투, 군사 쿠데타와 같은 국가 위기까지 가까이에서 목도한 역사의 증인이다. 창의문이 처음 역사의 전면에 나타나게 된 건, 인조반정 때.

1623년(광해군 14년) 3월 12일 밤 홍제원(서대문구 홍제동에 있던 조선시대 국영(國營) 여관)에 집결한 인조임금(당시 능양군)를 비롯한 반정군들이 세검정을 지나 창의문을 부수고 궁 안으로 들어가 광해군을 폐위하고 무력으로 정권을 잡았던 사건이다.

 

이외에도 1968년 1월 21일 김신조를 비롯한 북한 특수부대원 31명이 창의문 옆 도로를 넘어 청와대로 돌진한 사건, 군인들이 군사쿠데타를 일으킬 때도 이 문을 지났다. 창의문은 '올바른 것을 드러나게 하다'라는 본래의 뜻과 어긋난 '비운의 문'이기도 하다.

▲창의문 천장에 닭이 그려진 이유는?

                                                                                                                               ⓒ김종성


 

 


창의문 천장의 흥미로운 닭 그림

 


창의문을 지날 때 잠시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면 오래된 벽화를 감상할 수 있다. 그런데 천장 벽화에 웬 봉황새를 닮은 닭이 들어가 있다. 인왕산에서 내려오는 산세가 흡사 지네를 닮아 지네의 독기가 문을 넘어 궁궐에 이른다 하여, 창의문 천장에 지네의 천적인 닭을 그려 넣은 것이라고. 실제로 지네들은 북악산, 인왕산처럼 돌이 많은 산에서 산단다. 

문을 지나면 두툼한 옛 돌계단을 걸어올라 이층에 있는 문루(門樓)에 꼭 올라 가봐야 한다. 문루는 성문 위에 지은 조망좋은 공간이다. 북악산과 인왕산이 보이는 전망도 좋고, 무엇보다 창의문 곳곳의 옛스러운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말 '막새', 한자로 와당(瓦當)이라고 하는 지붕의 암수 기와와 처마 끝의 물고기 모양 등은 눈길이 머무는 멋진 예술 작품이다. 삼장법사, 손오공 등 서유기의 주인공들이 줄지어 있는 처마 위 잡상은 익살스럽기 만했다.

현재의 문루는 임진왜란때 불 타 사라진 것을 영조 때(1740) 건립한 것으로, 2008년 숭례문이 전소된 이후 창의문 문루가 도성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문루 안에 인조반정 때 공을 세운 인사들의 이름을 적은 나무판이 걸려 있어 눈길을 끈다. 반정 때 공을 세운 김류, 이귀, 이괄, 원두표 등 1등 공신에서 3등 공신까지의 공신명이 기록된 현판이다. 그 가운데 이괄의 이름에서 잊기 힘든 역사속 사건이 떠올랐다.

▲ 인조반정을 일으키고 벼슬을 받은 공신들을 기록한 현판

                                                                                                                                ⓒ김종성


'이괄의 난'으로 인조임금을 공산성이 있는 공주까지 피난가게 한 장수이기 때문이다. 무력으로 정권을 무너뜨린 벌인지 인조임금은 3번이나 서울을 버리고 피난을 가게 된다. 청나라의 침략인 정묘호란, 병자호란 그리고 임금으로 즉위한 초기 1624년에 벌어진 '이괄의 난'이 그것. 반란군이 서울을 점령한 것은 조선시대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일이 었다.

인조반정 후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벼슬과 상을 주는 논공행상이 문제였다. 인조는 반정에 공이 큰 공신 53명을 선정했다. 김류와 이귀 등은 1등 공신이 되고 이괄은 2등 공신이 되었다. 부임지로 명받은 평안도 영변에서 이 소식을 접한 이괄은 불만을 터트렸다.

사실 인조반정은 이괄의 과단성이 없었으면 성공하지 못했을 쿠데타였다. 반정군의 대장을 맡기로 한 김류는 정보가 누설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거사 장소였던 연서역(지금의 은평구 역촌동)에 나타나지 않고 자신의 무관함을 보이기 위해 집에서 머물고 있었다. 대장이 제때 나타나지 않자 반정군 진영은 동요했다. 바로 그 때 동요하던 군사들을 다잡아 안정시킨 인물이 이괄이었다. 이괄은 바로 병사를 이끌고 궁궐로 쳐들어가 광해군을 체포한다.


 

▲ 문루 지붕을 꾸며놓은 아름다운 기와 '막새'와 익살스러운 잡상

                                                                                                                                 ⓒ김종성


이괄이 대신 대장을 맡아 군사를 움직이자 김류는 그제서야 뒤늦게 현장에 나타나 반정에 합류했다. 이 때문에 반정 성공 직후 '이괄이야 말로 병조판서감'이라는 칭송이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미적거리며 눈치를 보았던 김류는 1등 공신이자 원훈(으뜸 元, 공훈 勳)이 되었는데 동요하던 군사들을 휘어잡고 공을 세운 자신은 겨우 2등 공신에 이름이 올라간 것이다.

이괄의 반란은 성공적이어서 승승장구 끝에 한양도성으로 들어오자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휘하로 몰려들었다. 문제적 인물 이흥립 장수도 그 안에 끼어 있었다. 인조반정이 일어나던 날 그는 궁을 지키는 훈련대장이었다. 창의문을 통과한 반정군이 창덕궁으로 진입하는 것을 수수방관하여 광해군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던 그였다. 그런 그가 이제 다시 이괄에게 붙은 것이다.

문루에 서니 눈 앞으로 청와대를 품은 백악(白岳, 북악산의 옛 이름)이 뒤로는 커다란 바위돌이 인상적인 인왕산이 문루 기둥을 액자삼아 운치 있게 펼쳐졌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천도한 한양 땅에 경복궁을 지을 때 무학대사는 인왕산 자락에, 정도전은 북악산 자락에 궁궐을 짓자고 주장했다 한다. 결국 정도전의 뜻대로 되었으나, 후일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태종)에게 비참한 죽임을 당하고 말았으니 인생사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ㅇ 교통편 : 수도권 전철 3호선 경복궁역 3번 출구 - 버스(7212, 1020, 7022) - 윤동주 문학관 하차 도보 2 
ㅇ 문의 : 종로구청 문화과 (02-2148-1823)


김종성 작가

http://sunnyk21.blog.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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